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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 시험 볼때도 커닝이 있었다? 설마 조선시대에 비행기가 있었다? 본문

정보/잡지식

조선 시대 과거 시험 볼때도 커닝이 있었다? 설마 조선시대에 비행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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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 시험 볼때도 커닝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를 등요하는 과거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응시를 했다고 합니다. 숙종 때는 성균관에서 시험을 치르다가 응시자 몇몇이 밟혀 죽는 사고가 있었고, 정조 24년에는 과거 응시자가 10만명을 훨신 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양반들이 과거에 열을 올린 것은 4대 이상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평민의 지위로 강등당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반들은 집안을 위해서라도 과거를 보고 벼슬자리에 나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시험 준비 과정에서 과거의 시험 문제와 모법 답안, 예상 문제등을 담은 책자인 초집을 구해 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험 때에도 부정행위가 횡행했다.

대표적인 부정행위로는 옆사람과 은밀히 말을 나누거나, 눈동자를 사방팔방으로 돌려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답안지와 초고지를 일부러 땅에 떨어뜨려 남으로 하여금 슬쩍 보게 하는 것, 입속에서 답을 웅엉거리는 행위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빡에도 커닝 조이를 콧속에 숨기거나 붓대 끝에 숨기기도 했고,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 시험을 보는 방법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쓰는 방법은 거의 다 조선시대에도 있었던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커닝의 방법에 있어서도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설마 조선시대에 비행기가 있었다고?

19세기 중엽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 문장전산고 에 보면, 임진외란 때 정평구란 사람이 비차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비차는 30리를 날았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는 정평구뿐만 아니라 윤달규라는 사람도 비치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되어 있고, 비차의 모양과 구조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학자 신경준 또한 여암전사에서 비치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정평구의 비차를 본 당시 진주 사람들이 선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그 업적을 보고 했으나 조정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규경에 따르면, 비차는 네사람을 태울 수 있고, 풀무로 배를 두들겨 바람을 일으켜 공중에 뜨고, 위로 올라가 백 리 길쯤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차는 기록만 존재할 뿐 유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것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는지를 확인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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